제목을 정하는 건 가장 힘들다. 제일 무난한 건 0102. 라고 숫자를 적기.
원래 내용을 압축하는 것은 가장 힘들다. 누가 그랬지, 나이가 들면서 짧은 글 적기가 더 힘들어진다고.
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어 보면 평소 보지 않던 곳이 보인다. 이 집에서 일년을 가까이 살았는데 지난 달에서야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리면 초밥 트럭이 왔는지 보이는 것을 알았고, 오늘에서야 뜨거운 물을 사용하면 보일러가 돌아가서 굴뚝에서 연기가 마치 구름에 중력이 생긴 것처럼 내린다는 걸 알았다. 굴뚝이라는 사물은 참 오랜만이다. 보일러라는 건 시골이라는 느낌,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도 없는데 굴뚝은 어쩐지 주변에 잘 없을 것 처럼 느껴진다. 그래도 누군가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니까 굴뚝은 필요하다.
연말에 내린 눈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. 본가에서는 눈이 몇 시간이면 금방 녹았는데, 이 곳에서 눈은 시간이 홀로 멈춘 것 같다. 내린 눈은 수확해서 이미 다 도망간 작물들이 자랐던 논밭에,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쌓여서 시간이 풀릴 때를 기다린다.
눈은 몇 도에 녹느냐는 말은 금방 답할 수 있다. 눈은 비가 얼어 생기는 거니까, 물이 어는 온도는 눈이 생기는 온도고 동시에 눈이 녹기 시작하는 온도다. 그럼에도 한날 한 시에 공평하게 내린 눈은 불공평하게 쌓여 있다. 이 공간에서 눈이 녹는 온도는 몇 도일까. 물론 머릿속으론 다 안다. 압력이 어떻고, 햇빛이 드는 곳이 있고, 사람들이 지나며 치워지는 것도 있다는 걸. 그래도 내가 보는 것은 찰나의 창 밖의 풍경이라 눈은 불공평하게 녹는 것처럼 보인다.
어릴땐 눈이 오면 녹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다. 나에게 눈은 몇 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빅 이벤트였고 그 이벤트는 야속하게도 짧으면 한두시간, 길면 하루이틀뿐이었다. 그 어린 시절에 눈이 녹지 않았다고 오히려 더 열심히 빌었는데 우습게도 지금 이 곳의 주변은 눈이 더 오래오래 남아 있다. 소원을 들어주는 데 너무 오래 걸리시는 것 아닌가요. 이제 난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줄었는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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